응답하라 1988에는 등장하지 않는, 컴퓨터
요즘 응답하라 1988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죠.
마눌님과 저 역시 본방사수는 거의 못하지만 재방송은 꼭 챙겨보는 응팔의 열렬한 팬이기도 합니다.
1988년이면 저와 마눌님이 꼬꼬마 중학생이던 시절, 드라마의 배경인 쌍문동은 학교 다니며 지나던 곳이라 더 특히 더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응답하라 1988을 재미있게 보다가 문득, 드라마에 컴퓨터는 전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즘처럼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50, 60명인 한 반에 컴퓨터 있는 집이 5명 쯤 되나 싶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컴퓨터는 '교육용'이란 꼬리표를 붙이고 나름 회자되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죠.
덕분에 책장 한 켠에 묵혀두었던 88년도 컴퓨터 잡지를 한 권 꺼내 볼까 합니다.
제가 컴퓨터 잡지를 직접 구입하기 시작한 것이 1988년도 입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3년부터 컴퓨터에 푹 빠져 지냈고, 집에 컴퓨터(8비트 애플 컴퓨터)가 있던 친구집에서 간간히 '컴퓨터 학습'이란 잡지를 본 적은 있지만, 직접 구입하게 된 것은 1988년 5월부터입니다.
헌책방에서, 혹은 친구의 컴퓨터 학습을 빌려 보곤 했는데, 1988년 5월 컴퓨터 학습에는 잡지사 창간 기념으로 컴퓨터를 경품으로 건 퀴즈가 실렸고, 당시 회사를 다니던 큰 누나를 졸라서 컴퓨터 학습 잡지를 손에 넣은 뒤로, 매달 용돈을 모아 한 권씩 사모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컴퓨터 학습은 1983년에 창간되었고 1988년 12월이면 이미 60여권의 잡지를 내놓고 국내 대표 컴퓨터 잡지로 자리 매김하던 때였습니다.
표지 디자인 역시 컴퓨터 그래픽을 넣은 꽤 깔끔한 느낌으로, 매월 컴퓨터 학습의 표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당시 컴퓨터 학습의 광고 첫 장은 늘 3M과 삼성 전자가 차지했고, 제품은 달라져도 업체 순서는 바뀌지 않곤 했습니다.
1988년 12월에는 3M 플로피 디스크와 삼성전자 SPC-1500 컴퓨터가 차지하고 있네요.
이 SPC-1500은 얼마뒤 저희 집 첫 컴퓨터가 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애플이나 MSX 컴퓨터를 살 껄 하는 후회가 막심했던 그런 컴퓨터입니다.
그나마 몇 안되는 컴퓨터를 가진 친구들은 애플 호환 컴퓨터나 MSX 컴퓨터를 갖고 있던 때고 SPC-1500이란 컴퓨터를 가진 친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MSX나 애플 컴퓨터는 게임(!) 소프트웨어를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SPC-1500은 그런것도 참 어려웠는데요, 요즘으로 말하자면 안드로이드나 아이폰 대신 블랙베리나 윈도우폰을 산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대형 서점이나 백화점에도 꽤 큰 컴퓨터 매장들이 있었고, 특히 종로서적은 중학생이던 제가 단골로 찾아 컴퓨터 관련 서적과 소프트웨어를 구경하며 일요일 내내 죽때리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중반만 해도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때라 컴퓨터 잡지에는 월 회비를 내면 애플 소프트웨어 몇 장을 복사해준다는 식의 회원제 모집 광고가 즐비했습니다.
올림픽을 계기로 프로그램에 대한 저작권법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기 시작한 그런 시절이지만 본격적인 단속 이전이라 1988년 12월의 컴퓨터 잡지에도 소프트웨어 하우스(이라 부르고 복사집이라 읽는)에 대한 광고가 많이 실려있네요.
'더어드웨이브'라고 하는 꽤 큰 규모의 소프트웨어 하우스 광고에는 인쇄된 컬러 게임 라벨을 오려서 복사 디스켓에 붙여 쓰면 좋다는 깨알같은 팁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국내 애플 컴퓨터는 83, 4년을 기점으로 국내에 보급되었는데 당시 최신 기종인 Apple IIe가 아닌 Apple II+가 전부였고, 88년 5월에야 Apple IIe 호환기종인 MR-128이 출시됩니다.
Apple II+보다 성능이 뛰어난 Apple IIe는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정부에서 교육용 컴퓨터를 16비트로 확정 발표하면서 8비트 호환 기종들은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당시에는 잡지를 보고 군침만 잔뜩 흘렸던 닌텐도 패미컴이었고, MSX의 일본 게임들 중 몇몇은 오락실에서도 즐길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죠.
사라만다와 몽대륙에 쏟아부은 동전이 얼마더라...
교육용으로 적당한 컴퓨터가 8비트인지 16비트인지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정부에서 교육용 컴퓨터를 16비트로 발표한 뒤 IBM-XT 호환 기종들이 빠르게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차지해 갑니다.
특별보너스 3번, '진기한 특별사은품'이 뭔지 갑자기 궁금!
당시 IBM-XT 컴퓨터는 주 메모리 용량이 640KB나 512KB 였던 반면, 저렴한 교육용 컴퓨터들은 256KB를 내장한 제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수 년에 걸쳐 보급율도 높아졌고 소프트웨어 개발도 꽤 이루어졌던 8비트 컴퓨터 대신 256KB의 메모리를 가진 IBM-XT 호환 기종들이 도대체 '교육용'으로 어떻게 선정될 수 있었는지...(모르긴 해도 업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꺼란 생각이...)
88년은 16비트 컴퓨터에도 플로피 디스크가 들어가는게 고작이던 때, 광고에 실린 시게이트 80MB, 42MB 하드디스크는 요즘으로 치면 수십 테라짜리 SSD 정도 되려나요?
우등생이 모두 모였'읍니다'
아, 이로부터 3년 뒤 10MB짜리 하드디스크가 달린 컴퓨터를 친구 집에서 보게 되고, 5년 뒤에는 저도 200MB짜리 하드디스크를 갖게(!)되니 수십 테라 SSD와 비교하는 건 좀 무리일까요?
2009/11/04 - 16년전 하드디스크를 컴퓨터에 연결해 보니...
들쭉날쭉한 기사 수준과 방향
당시 컴퓨터 학습의 특집은 그야말로 들쭉날쭉했습니다.
트랜드를 소개하는 형식의 특집이 실리는 달은 중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88년 12월의 특집은 '3차원 그래픽과 문자의 입체 표시', 과연 이 책의 독자들 중 저 특집의 내용을 이해할 만한 사람은 몇이나 되었을까요?
그래도 '시장 가이드-어디서 무엇을'이란 제목으로 달고 나온 기획 취재에는 청계천 세운상가와 용산전자상가에 대한 내용이 평이하게 실려 있네요.
세운상가는 국민학생 시절부터 디스켓을 복사하러 가끔 드나들었고, 깡패를 만나 주머니를 털리기도 했던 여러가지 추억이 있던 곳입니다.
제가 용산전자상가를 본격적으로 드나들었던 90년대 초중반은 이미 전자상가로서의 입지가 완전히 다져졌던 시기였던 반면 1988년 12월의 컴퓨터 잡지에는 용산전자상가를 '세운상가처럼 떠들썩한 상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고, 눈요깃거리도 많지 않지만 여유롭게 매장을 둘러볼 수 있어서 좋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은 대부분의 컴퓨터 관련 제품을 온라인에서 구입하고 있는터라 용산전자상가를 방문할 기회도 점점 줄고 있는데, 얼마전 다녀왔던 용산전자상가의 분위기는 '떠들썩한 상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고, 눈요깃거리도 많지 않지만' 88년 컴퓨터 잡지의 묘사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라 왠지 느낌이 싸~하네요.
'오리지널' 테스트리스가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 역시 1988년이었나 봅니다.
'소련제' 컴퓨터 게임, 테트리스
88년 당시에도 '마이크로소프트 신화의 주역'이라고 묘사되고 있는 빌게이츠, 부쩍 젊은 모습인데 왠지 저는 이런 모습이 더 익숙합니다ㅎㅎ
용산 전자상가 내 전자랜드가 88년 10월 29일에 문을 열었네요.
요즘 응답하라 1988에 자주 등장하는 '한일은행' 간판이 전자랜드 사진에 떡하니 박혀 있어 반갑습니다ㅎㅎ
울티마 6편이 제작중이고 YS 3편이 곧 등장할 예정이라는데, 개인적으로는 울티마 보다는 YS류의 일본식 RPG를 더 재미있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컴퓨터 잡지에서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게임 리뷰 섹션입니다.
몇 년 지나 90년대로 접어들면서 게임전문 잡지들이 속속 등장하지만 이때만해도 컴퓨터 학습의 게임 분석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게임 줄거리나 힌트를 알려준다거나 게임을 평가하는 수준이 아닌, 게임 시작부터 마지막 보스 등장까지 샅샅이 분석하는 식의 리뷰일 때가 많아 컴퓨터 학습의 게임 리뷰를 안보는 게임 매니아들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종이에 인쇄된 소스 코드를 몇날 며칠 입력하던 시절
명색이 '컴퓨터 학습'인데, 게임 리뷰만 실려있으면 안되겠죠.
88년 당시 컴퓨터 = 컴퓨터 프로그래밍 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고, 유난히 컴퓨터 프로그램에 흥미를 갖는 어린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저 역시 몇 안되는 SPC-1500용으로 나온 베이직 코드를 무작정 따라 입력하면서 결과물을 보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소스코드나 실행 파일을 손쉽게 다운로드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고, 그렇다고 잡지 부록으로 디스켓이 제공되던 시절도 아니다보니(잡지 부록으로 CD를 제공하는 것은 90년대 초, 중반에야 시작됩니다) 모든 소스코드는 잡지에 인쇄된 것을 보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입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심지어 며칠 걸려 입력한 소스코드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에러를 뿜을 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입력 과정에서 오타가 난 경우도 있었지만 인쇄 과정에서 소스코드가 한뭉텅이씩 빠지거나 오타가 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빡치는(!!!) 순간
당시 카세트 테이프나 디스켓을 들고 컴퓨터 학습 사무실로 방문하면 소스코드를 복사해 주기도 했다는데, 아쉽게도 저는 컴퓨터 학습을 만드는 잡지사에 방문해 본 경험은 없었습니다.
컴퓨터 학습에는 독자들이 손으로 그려보낸 만화가 매달 실리곤 했습니다.
매달 내놓는 주제에 대해 독자들이 만화를 그려보내고 잡지사가 실어주는 방식, 이 8컷 짜리 만화들은 요즘 웹툰의 할아버지쯤 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림은 잉크나 볼펜으로 그려보내고 글씨는 연필로 적어넣으라는 안내문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도 이 8컷 만화에 몇 번 도전했지만 한 번도 뽑히지 못했던...ㅠㅠ
중고장터 역할까지 했던 88년의 컴퓨터 잡지
요즘은 중고 제품을 팔거나 살 때 중고나라, 혹은 대형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찾는게 일반적이지만 전화선을 이용하는 PC통신조차 활성화되지 않았던 88년에는 컴퓨터 잡지가 그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사고 팔 컴퓨터 기종과 가격 등을 적어 잡지사로 보내면 다음달 잡지에 실어주는 방식이었는데요, 뭔가를 팔기 위해 보름에서 한 달 남짓 기다려야하는 것은 요즘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때는 컴퓨터 전문 거래 장터의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말하자면, 중고나라
무엇보다 잡지에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같은 개인정보를 싣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당시에도 중고 장터의 사기꾼들은 존재했습니다.
아이가 컴퓨터를 사러/팔러 갔다가 돈이나 컴퓨터를 빼앗겼다는 피해 사례도 간간히 올라오면서, 거래하는 사람의 신분을 철저히 확인하고 어른과 동행하라는 안내문이 함께 뜨기도 했습니다.
PC 가격 정보 역시 컴퓨터 잡지에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였지만, 정가 위주로 적혀 있었기에 컴퓨터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가전 대리점이나 전자상가에 방문하여 컴퓨터를 구매하던 시절이었는데, 역시 업자에게 바가지를 쓰는 피해자들도 꽤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컴퓨터 학습의 마지막장 광고에는 롯데제과의 광고가 자주 실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1988년 12월에는 월드콘이 실렸는데, 희망소비자가격 300원이라는 가격이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군요.
컴퓨터 학습의 마지막 장 광고는 대우전자의 IQ1000, IQ2000, X2 등의 8비트 MSX 컴퓨터와 재믹스라는 게임기 광고들 차지였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컴퓨터 광고에 '교육용 컴퓨터'라는 단어가 빠지질 않습니다.
광고에는 학교 수업에 도움을 주는 학습용 소프트웨어들을 많이 갖추고 있으니 30~40만원 짜리 컴퓨터를 사주면 학교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PC 기종을 막론하고 제대로 된 학습용 소프트웨어는 전무했고, 단지 (컴퓨터를 팔려는) 업체의 상술과 (컴퓨터를 갖고 싶은) 아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부모님 설득용으로 사용되는 레파토리였습니다.
컴퓨터로 척척척~ 아이~큐 2000
일단 구입한 뒤에는 비싼 게임기로 쓰이곤 했고, 저도 방학때마다 사촌동생 집에서 IQ2000을 게임기 삼아 며칠씩 놀았던 기억이 나네요ㅎㅎ
이렇게 1988년도 컴퓨터 잡지, 컴퓨터 학습에 대한 리뷰를 마칩니다.
생각같아서는 좀 더 많은 페이지를 살펴보고 싶었고 더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제게만 익숙한 내용이다 싶어 대부분 추려내버렸습니다.
워낙 정보가 많아 걸러가며 봐야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의 컴퓨터 잡지는 컴퓨터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부터 시시콜콜한 모든 것을 실었던 종합 선물 상자 같은 역할을 했었네요.
단지 컴퓨터에 대한 흥미만으로 첫페이지 광고부터 마지막 페이지 광고까지 한장 한장 빼놓지 않고 읽었던 1988년의 컴퓨터 학습과 함께 옛 생각에 잠겨봅니다ㅎㅎ
- 2013/12/12 - 응답하라 1994, 1994년의 컴퓨터 잡지 - Hello PC
- 2012/10/29 - 컷스로트 아일랜드, 한국 최초 발매 DVD에 얽힌 추억들
- 2012/08/17 - 15년 전 작성했던 디지털 카메라 벤치마크 기사를 보니
- 2012/07/12 - 20년 전 비디오CD, 컴퓨터에서 재생해보니
- 2012/06/06 - 윈도우 3.1이 어땠는지 궁금하세요?
- 2012/05/09 - 추억의 쓰레기들을 정리하다
- 2011/02/21 - 컴퓨터로 알아보는 연령 측정
- 2010/09/14 - 손으로 쓴 15년 전 컴퓨터 원고를 꺼내보다
- 2009/11/09 - 때 아닌 윈도우 3.1 개봉, 설치기
- 2009/11/04 - 16년전 하드디스크를 컴퓨터에 연결해 보니...
'생활의 지혜 >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해도 어김없이 다가온 추석. 주문진과 방학동을 바삐 움직였던 2016년 추석 명절 (0) | 2016.09.16 |
---|---|
전원을 꺼도 번쩍거리는 LED 조명 잔광 해결. LED 잔광 제거 콘덴서 설치 방법 (4) | 2016.06.14 |
응답하라 1994, 1994년의 컴퓨터 잡지 - Hello PC (25) | 2013.12.12 |
깨진 유리를 쉽게 버릴 수 있게 한 아파트 관리소의 굿 아이디어! (17) | 2013.06.12 |
아내 말을 들었더니 떡이 생겼다! 대형 마트에서 생긴 일 (39) | 2013.05.29 |
- 생활의 지혜/일상다반사
- 2015. 12. 20. 21:09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 질문 댓글은 공개글로 달아주세요. 특별한 이유없는 비밀 댓글에는 답변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