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쓸 일이 있지 않을까? 버리지 못하는 것들
저는 버리는 것을 잘 못합니다.
책, CD, 컴퓨터 부품 등등, 지금 당장은 쓸 일이 없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쓸 일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두다보니, 제 방은 언제나 십년 이상 된 물건들로 반 고물상 같은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오랫동안 놔둔 물건을 제대로 써 본 기억은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 컴퓨터와 관련된 것들이다보니, 1~2년만 지나면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버리질 못하면 정리라도 잘 해야하는데, 정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보니, 야적(?)한 상태로 방치해두게 되는군요.
그나마 보관해 두었다가 제대로 써먹은 물건이라면, 사진에 보이는 30핀, 72핀 메모리와 486, 펜티엄 초기 CPU 정도인데요, 요 넘들은 PC 조립책을 집필하면서 사진 자료로 제대로 써먹었습니다. ㅎㅎ
지난 1년동안 건드린 적이 없다면 평생 건드릴 일이 없다
얼마전, 서점에 나갔다가 정리와 관련된 책을 잠시 들여다 본적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이 쓴, 저처럼 버리지 못하고 하나하나 쌓아두는 습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정리 지침서였는데요, 잠시 서점에서 읽어본 글귀중에 "1년동안 쓰지 않은 물건이라면 평생 쓸 일이 없는 물건이므로 과감하게 버려라"는 내용만 기억에 남는군요. 이런 내용으로 책까지 나온걸 보면 저같은 성격의 사람들이 꽤 있나 봅니다.
뭐 어쨌거나, 책에서 본 내용은 그러하지만 그걸 또 실천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보니, 여전히 방치 상태였습니다.
결혼 전 사용하던 본가의 제 방 역시 마찬가지로 추억의 쓰레기들이 많이 쌓여 있었는데, 얼마전 집수리를 하게 되면서 드디어 정리해야할 시간이 되어 과감한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정리 전 방입니다. 컴퓨터 관련 잡지, 17인치 CRT 모니터, 게임 패키지 등등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찍어둔 사진은 이것밖에 없지만, 책상 아래/서랍 안/반대쪽 벽면도 이런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일단 버릴 물건들을 밖으로 꺼내놓았습니다. 이미 고물상이 두어차례 싣고 나간 터라 양이 적어진 상태입니다.
폐기처분 1차 대상은 과거 컴퓨터 관련잡지에 딸려온 부록 CD입니다.
요즘은 컴퓨터 관련 잡지들이 씨가 마른 상태이지만, 90년 초반 부터 10년간은 꽤 많은 컴퓨터 잡지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던 시기였고, 94년 경 부터 부록 CD가 나오면서 쌓여 있는 CD들만해도 수 백장에 달하는군요. 비닐도 벗기지 않은채 보관중이던 부록 CD들을 모조리 내보냈습니다.
책상 서랍안에 고이 모셔져 있던 3.5인치,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들도 이번에 모두 내보냈습니다.
5.25인치 플로피 드라이브는 이제 가지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3.5인치 플로피 드라이브는 아직 보관중입니다 ㅎㅎ) 드라이브가 있다 하더라도 십수년의 나이를 먹은 플로피 디스크에 담긴 파일은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죠.
옛날 컴퓨터 잡지들 중에 제 원고가 실린 잡지들을 뺀 나머지들도 모두 버렸습니다.
원고가 실린 잡지들만해도 큰 책장을 가득 채우고 남는 상황이라, 더 이상 다른 잡지들까지 안고 있을 상황이 못되었습니다.
사진엔 유독 PC라인이 많이 찍혔네요.
90년대 초중반에는 동서 게임 채널 등의 업체를 중심으로 한 게임 패키지 시장이 꽤 활발했었죠.
게임을 그닥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정품 패키지들이 꽤 있었습니다.
"정품 패키지"라서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도스 기반의, 3.5인치 플로피 버전이다보니, 실행할 수 없는(귀찮은)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어린 시절 꽤 재미있게 했던 Apple, MSX 기반의 로드런너, 레스큐 레이더스, YS, 하이드라이드, 레밍스와 같은 고전 게임들을 에뮬레이터를 통해 몇 번 해본적이 있었는데, 옛날과 같은 재미는 없더군요.
그냥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야 할 것 같아 의미없는 정품 게임들도 모조리 고물상에 넘겼습니다.
버릴까 말까 살짝 고민했던 한컴 오피스 97 패키지 입니다.
CD는 제 작업실에 모셔져 있고, 정품 박스안에 든 것은 매뉴얼과 보증서 등등이 었는데, 이제 한글은 문서 뷰어 정도로 사용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한컴 오피스 97도 과감히 버리게 되었네요.
숙청에서 살아남은 것들
대대적인 쓰레기 숙청을 했지만 일부는 꿋꿋이 살아남았습니다.
한 때 대단한 애정을 쏟았던 것들인데요,
먼저 한글 윈도우 3.1 패키지, OS/2 패키지, 디아블로 게임 패키지가 되겠습니다.
93~4년 쯤이던가, 아는 형님의 추천으로 알게된 미니디스크(MD)에 흠뻑 빠졌었습니다.
그때는 워크맨과 같은 카세트 플레이어가 휴대용 기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음악을 좀 듣는다 하는 친구들은 휴대용 CD플레이어를 들고 다닐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휴대용 MD 플레이어를 스윽~ 꺼내면 그 포스가 대단했었죠.
몇 년뒤에는 휴대용 MP3 플레이어가 등장하면서 MD파와 MP3파가 서로가 갑이라며 일대 토론을 벌였지만, 93~4년 즈음은 MD가 갓 등장한 시기였고 휴대용 MP3 플레이어는 개념조차 없던 때였는데요, CD롬 드라이브의 디지털 출력 단자에다가 DIY한 광단자를 연결해 광출력으로 한땀한땀 녹음한 MD 미디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MD 플레이어도 없고 미디어만 남아있지만 조만간 MD 데크라도 하나 구해서 다시 들어볼까 합니다.
정리하다보니 LS-120 미디어도 몇 장 나오는군요.
이건 97년도에 컴퓨터 잡지사 제품 리뷰를 하면서 LS-120 드라이브와 함께 보유하게 되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이메이션(3M)에서 플로피 디스크를 대체하기 위해 내놓은 LS-120은 당시만해도 고용량인 장당 120MB의 저장 용량을 자랑했는데요, 아이오메가의 ZIP 드라이브가 득세하던 시기에 경쟁 제품이었습니다.
LS-120 드라이브는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도 읽을 수 있는 하위 호환성이 강점이었고 나중에는 용량을 두 배로 늘린 LS-240도 출시되었지만, 이후 CD레코더의 가격이 쑥쑥 내려가면서 주류로 자리잡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네요.
7~8장의 LS-120 미디어에는 원고 등의 중요 자료들을 저장해 놓았는데, 이젠 드라이브가 없으니 속에 담긴 데이터를 열어볼 일은 영영 없을 것 같지만, 십 몇년이 지난 지금도 미디어는 꽤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과감하게 버리고 나니 지저분한 방이 깔끔!
딱히 쓰지도 않을 물건 들을 '왠지' 아쉬운 느낌에 하나둘 쌓아두다보니 온 방안이 지저분하기 이를데 없었는데요, 마대자루로 2~3개쯤 되는 양을 버리고 나니 집안이 다 넓어지는군요.
십수년이상 캐캐묵은 추억의 쓰레기들, 버릴때는 조금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싹 다 비우고 나니 후련합니다. '십년묵은 체증'이란 말이 썩 와닿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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