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속의 잡동사니들
본가에서 사용하던 제 방의 구석구석에는 구시대의 잡동사니들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고쳐야할 습성 중 하나가 앞으로 쓸 일이 없는 물건들을 (혹시나 쓸 일이 있지 않을까) 모아두는 것인데요, 쉽게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네요.
며칠 전, 본가를 들렀다가 제가 쓰던 방의 책상을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슨 내용이 담겼는지도 모르는 5.25인치와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잔뜩, 1999년, 뉴질랜드 배낭여행 도중 할인 매장에서 뜬금없이 필이 꽂혀 샀던 닌텐도 게임보이와 게임팩, 그외에 여러가지 문서 및 종이 쪼가리 등등...
책상속은 그야말로 고물 전시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몇 번 안한 신품과 같은 게임보이인데요, 사 가실분~?
이런 저런 물건들을 살펴보는 와중에 책상 깊숙한 곳에서 하드디스크 한 대를 발견했습니다. 어라? 이게 여기 있었네? 94년도인가, 회사에서 컴퓨터에서 사용하다가, 하드디스크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집으로 가져와서 사용했던 하드디스크였습니다.
당시, 회사 컴퓨터는 IBM Valuepoint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IBM Value Point는 IBM의 PS/2 모델이 가격과 호환성에서 IBM PC 호환기종에 밀려 도태되면서, 시장에서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내놓은 'IBM PC 호환기종'입니다.
IBM이 IBM 호환기종을 내놓았다는 얘기가 좀 웃기지만, IBM이 콧대 높게 밀어붙이던 PS/2는 요즘 PC와 달리 폐쇄적이고 독자적인 내부 구조였을 뿐 아니라 가격이 비싸 시장에서 인기를 끌지 못했고, 결국은 시장에서 널리 쓰이는 '보급형'의 제품들을 내놓게 되었는데, 그 제품이 바로 Value Point 였습니다(그랬지만서도, 92년에 출시된 Value Point는 95년에 단종되었다고 하네요).
IBM이 내놓은 IBM 호환기종, Value Point
사실, Value Point 컴퓨터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키보드입니다.
당시, Value Point의 키보드는 키를 누를 때 마다 '딸깍딸깍' 하는 소리가 나서,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그 소리때문에 사무실에서 구박을 받기 일쑤였죠.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매우 고급의 기계식 키보드였었는데요, 지금 같으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키보드를 모조리 바꿔주고 Value Point의 키보드를 냠냠~ 했더라면, 평생 쓰고 남을 기계식 키보드를 확보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ㅠㅠ
93년 제조, 210MB의 WD 하드디스크
하드디스크 외관은 요즘 제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평범한 3.5인치 하드디스크네요. Western Digital의 210MB, Caviar 1210입니다.
스티커에 93년 9월 22일이라는 제조일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그 밑에는 IBM PC 납품용임을 알리는 스티커가 함께 붙어 있습니다.
93년 9월 22일 제조된 Caviar 1210
하드디스크 바닥면의 모습도 요즘 제품과 크게 차이나지 않고, 커다란 기판에 SMD 방식의 저항들만 가지런히 눈에 띕니다.
사실, 16년전 제품 치고는 기판 상태가 상당히 세련된 모습인데요, 당시에 컴퓨터 부품에도 일반 저항이 널리 쓰였던 상황임을 생각해보면, SMD 방식을 채용한 이 제품은 나름 시대를 앞서가는 제품이 아니었나...짐작해 봅니다.
Caviar 1210의 바닥 기판부
뭘 보고 세련되었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당시 같은 사무실에서 노장이긴 하지만 나름 현역으로 뛰었던 286(AT) 컴퓨터에 담긴 하드디스크의 모양은 이랬습니다. 20MB 용량의 MFM 방식의 하드디스크인데요, 앞서 보여드린 기판과 많은 차이가 있죠?
20MB, MFM 방식의 하드디스크
웨스턴 디지털 홈페이지(http://www.westerndigital.com)에서는 이 제품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용량 212MB이며 플래터 1장으로 200MB를 구현한 제품이네요(역시 당시로서는 앞서가는 제품이었습니다).
디스크 회전 속도는 3314RPM(요즘 하드디스크는 대부분 7200RPM)입니다.
11MB의 내부 전송 속도나 탐색 속도 역시 요즘 제품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WD 웹사이트의 Caviar 1210 상세 정보
93년 제조된 하드디스크, 제대로 작동은 할까? 뭐가 들었을까?
컴퓨터 부품의 나이가 16살이라면, 대부분 현재의 컴퓨터에 연결할 수 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메모리, 그래픽 카드, CPU 등 많은 부품들이 연결 방식까지 모두 바뀌어버렸는데요, 다행히 이 하드디스크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연결 방식인 E-IDE 방식으로, 현재 사용중인 컴퓨터에 간신히 연결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하드디스크 연결 방식도 시리얼 ATA로 넘어간지 오래고, 많은 수의 메인보드에 E-IDE 연결 단자가 한 개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다, 인텔 등 일부 메인보드에는 아예 E-IDE 포트를 없애버리는 등 E-IDE 단자를 퇴출시키는 추세라, 이렇게 연결해 볼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이 아닌가...생각되는군요^^;;
컴퓨터에 하드디스크를 연결하고 전원을 켜자, 요즘 데스크탑 컴퓨터에서는 듣기 힘든, 우렁찬 모터 회전 소리가 들리며 구동을 시작합니다(서버에 사용하는 15000RPM급 하드디스크 소리를 방불케 합니다).
컴퓨터에서 하드디스크를 인식하는 과정 역시 별 문제 없었는데, 다만 윈도우 로고가 지나간 후, 바탕화면이 보일 때까지,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부팅이 끝나고 내 컴퓨터를 클릭해 탐색기를 열어보았습니다. 연결한 하드디스크가 정확히 표시되는군요. 전체 크기 202MB(GB가 아닙니다^^;;), 사용 가능한 공간은 125MB, 의외로 담겨 있는 파일이 적은 듯 합니다.
포맷 용량 202MB, 볼륨 네임은 NEW HDD ^^;;
파일 목록을 보니, 도스 부팅용 파일들이 설치되어 있네요. 도스를 사용했던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할 파일 이름들, IO.SYS, MSDOS.SYS, COMMAND.COM, Config.sys, Autoexec.bat 파일들이 보입니다^^
가장 최근의 파일 날짜는 1999년이네요. 1993년 하드디스크인데, 1999년까지 사용했다니, 나름 꽤 오랫동안 활동한 하드디스크로 보입니다. 담겨있는 파일들의 날짜로 유추해 볼때, 98, 99년 무렵에는 윈도우95나 98의 백업용 하드로 잠깐잠깐 연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스 시스템 파일이 가득 찬 루트 드라이브
담겨 있는 프로그램들은, 백업용이라 그런지 별 것 없습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PC 통신 프로그램인 이야기 5.3, 당시 필수 시스템 프로그램이었던 노턴 유틸리티, 메모리 관리 프로그램인 386Max, 디스크 복사 프로그램인 DCF 등이 눈에 띄고 파일 관리 프로그램으로 노턴 코맨더(NC)와 M이 있습니다.
이야기 5.3과 같이 그래픽 모드에서 실행되는 프로그램은 대부분 실행중 에러를 내고 멈춰버립니다. 덕분에 인터넷에 있는 화면 캡쳐를 퍼왔는데, 시작 화면의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길'이란 문구가 무척 눈길을 끄는군요.
한 시대를 풍미한 PC 통신 프로그램, 이야기 5.3
NCD(Norton Change Directory)는 처음 컴퓨터를 켜자마자 NCD가 실행되도록 하여 원하는 디렉토리를 찾아가도록 설정되어 있어, 노턴 유틸리티는 모르더라도 NCD 화면은 익숙한 사용자가 많을 만큼 유명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NCD 실행화면
M.exe 역시 도스 사용자들에게는 필수 유틸리티라고 할 수 있었는데요, NCD가 단순히 디렉토리를 옮겨가는 기능만 있었던 것에 비해 파일 관리 기능이 강력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국산 파일 관리 프로그램, M
화면에 하나의 폴더만 보여주는 M에 비해 NC(노턴 코맨더)는 화면을 두 개로 나누어 파일 관리를 보다 편리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M보다 NC를 더 편리하게 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M의 호적수, NC
DCF(Disk Copy Fast)는 플로피 디스크를 빠르게 복사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예전에는 1대의 플로피 디스크만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요, 이런 컴퓨터에서 플로피 디스크를 복사할 때, 원본과 복사본을 여러번 갈아끼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원본과 복사본을 한번만 갈아끼는 것으로 작업을 완료할 수 있어 아주 편리했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프로그램은 매우 다양하여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았지만, 저는 즐겨 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플로피 복사 프로그램 DCF
기왕 연결했는데, 속도도 비교해 볼까?
하드디스크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보니, 속도는 얼마나 나올까, 요즘 하드디스크에 비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HD Tune으로 속도를 재봤습니다만, 실제 전송률이 초당 1MB 가량인 것을 보면, 그냥 빙긋 웃음만 나오는군요. 그래도 명색이 하드디스크인데 말이죠...^^;;
속도 측정 결과. 하지말걸 그랬나?
현재 주력으로 사용중인 히다치 1TB 하드디스크의 전송 속도는 평균 89.5MB, 최대 113MB입니다. 단 2초 정도면 200MB 하드디스크를 꽉 채워버리는 속도네요...크기는 같은데, 용량은 5000배, 속도는 100배 가량 빨라졌습니다.
가격은? 당시 200~250MB 용량의 하드디스크가 25~6만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걸 보면 가격은 절반이군요^^;;
1TB 하드디스크의 테스트
옛날 컴퓨터 환경을 확인할 수 있었던 옛날 하드디스크
하드디스크 이곳 저곳을 들여다 보다보니, 터보C를 가지고 나름 열심히 독학을 하면서 프로그래머의 꿈을 키웠던 시절도 생각이 나고, 미디 파일과 MOD 파일 등 다양한 음악 파일들을 듣자니, 요즘 MP3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초라하지만, 배경 음악으로 틀어놓고 PC통신을 즐기던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생각 같아서는 십몇년전에 들었던 미디 파일이라도 하나 올려서 같이 듣고 싶지만, 저작권 관련 태클이 두려워 감히 올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PC 통신을 하면서 갈무리(캡쳐) 해두었던 텍스트 문서들도 꽤 되는데, 조합형 문서라 그런지 제대로 읽히지 않는 문서들이 꽤 되는군요. 그래도 아래 한글로 코드 변환을 하면 읽혀질텐데, 한글 프로그램에서도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만 뜹니다. 방법을 고심해보면 읽을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수고를 하여 읽을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제는 손톱만한 크기의 메모리의 발끝도 따라가기 힘든 구닥다리 하드디스크지만, 십수년전의 컴퓨터 환경을 확인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보관해 두어야 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앞으로 이 하드디스크를 컴퓨터에 다시 연결해 볼지, 연결할 수 있는 컴퓨터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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