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쓴 15년 전 컴퓨터 원고를 꺼내보다

손으로 쓴 엉망진창의 15년 전 컴퓨터 원고, 추억의 부스러기

올해 여름은 컴퓨터 조립책의 개정판 원고 작업을 위해 바쳤습니다.

 

2008년 6월에 출간했던 '통 PC조립 & 하드웨어 지대로 배우기'가 서점에서 꽤 괜찮은 반응을 얻어 출간이후 관련 서적 중 베스트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데다 5쇄까지 인쇄하는 예상외의(?) 선전을 해서인지, 출판사에서 2010년판 개정판을 발간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사실 개정판 작업이라 지난 초판 작업보다는 좀 쉬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년동안 CPU와 메인보드 쪽은 이미 세대가 바뀌었고 운영체제 역시 윈도우 7으로 바뀌어 작업 기간은 예상보다 훨씬 긴, 3달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개정판 작업을 시작한 것이 지난 6월이고, 초벌 원고를 넘긴 것이 9월 초이니 한 여름을 개정판 작업에 꼴딱 쏟아부었네요.

덕분에 피서는 커녕 3달동안 바깥 외출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쌓여 있던 잡지책에서 발견한 다이어리

어쨌거나 개정판 초벌 원고는 9월초에 모두 넘겼고, 이제 한결 여유가 생겼습니다.

원고 작업동안 소홀했던 본가와 처가집도 부지런히 다녀야 할텐데요, 며칠 전에는 집사람과 본가를 다녀왔습니다.

 

본가의 제가 쓰던 방의 벽 한 켠에는 책 무더기들이 쌓여있습니다.

80년대말, 90년대 초반까지는 컴퓨터 학습, 마이컴, 헬로우 PC 등의 컴퓨터 잡지들의 열렬한 독자였으며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꽤 많은 잡지에 하드웨어 리뷰와 벤치마크 기사들을 기고 했고, 본인 원고가 실리면 한 권씩 집으로 보내오는것이 관례였던 탓에 꽤 많은 잡지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책의 양이 꽤 되는 편입니다.

 

한때는 제 원고가 실린 부분만 오래서 부피를 줄여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바엔 그냥 죄다 버리고 말지...하는 생각에 그냥저냥 가지고 있습니다.

컴퓨터 잡지 책장

 

부모님께서는 가끔, 저 책들 그냥 버리면 안되겠냐고 하시지만, 그래도 가끔 본가에 들르면 한 권씩 꺼내보면서 옛날을 회상하곤 합니다.

이번에도 잠자리에 들기전, 습관처럼 쌓인 책들을 뒤적였는데, 오래된 다이어리 한 권이 튀어나왔습니다. '1995 Hitel'이라고 적힌 다이어리군요.

컴퓨터 원고 하이텔

 

펼쳐보니 01410, 700-7000과 같이 낯익은 접속 번호들이 눈에 띕니다.

제가 PC통신을 시작한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에는 2400bps 모뎀이 고작이었지만, 95년 다이어리라 그런지 이미 고속 모뎀이라 하여 9600, 14400bps와 같은 용어들이 눈에 띕니다.

컴퓨터 원고 하이텔

 

다이어리를 좀 더 넘기다 보니, 손으로 쓴 컴퓨터 잡지 원고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당시 저는 공익 근무중이었고, 근무 도중 짬짬히 컴퓨터 잡지에 실을 원고들을 작성하곤 했는데, 집에서야 컴퓨터로 원고 작업을 했지만, 바깥에서는 이렇게 손으로 원고를 쓰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손으로 글씨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는데,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써야 하는 상황이다보니 개발새발 글씨가 날아다닙니다ㅡㅡㅋ

컴퓨터 원고 하이텔

 

94, 95년, 96년에는 OS/2라는 운영체제에 미쳐 살아갈 때 였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3.1은 도스쉘 수준으로 거의 쓰이지 않던 상황에서 만난 IBM의 OS/2 2.1은 굉장히 새롭고, 충격적이었으며, 미래 지향적으로 보였던(?) 운영체제였습니다.

 

특히 IBM은 OS/2 3.0 버전으로 넘어오면서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했습니다.

윈도우 버전으로 출시됐던 한글이나 PC-DIC 등의 프로그램들이 OS/2용으로 출시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도 꽤 높아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OS/2 매니아로서, OS/2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컴퓨터 잡지에 기고를 시작했습니다.

OS/2 튜닝 팁을 시작으로 당시만해도 사용자가 극히 적었던 웹서핑을 OS/2에서 할 수 있는 방법 등등 꽤 다양한 OS/2 관련 기사를 써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컴퓨터 원고 하이텔

 

몇 달간 잡지사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드웨어 리뷰와 벤치마크 쪽에도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그래픽 카드, 사운드 카드 등의 벤치마크가 단골 기사였는데, 이 원고는 사운드 카드의 Full Duplex 기능에 관한 벤치마크 기사였습니다.

컴퓨터 원고 하이텔

96년 1월 PC 서울

원고다운 원고를 처음 보냈던 잡지가 PC 서울이었습니다.

이 책은 표지에 여자 모델들을 싣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스타일이었습니다(이제 오프라인 잡지 시장이 거의 괴멸하다 시피한 상황이고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PC 사랑의 표지 스타일도 이와 비슷한데, 사실은 PC 서울이 PC 사랑보다 약 1년정도 먼저 출간됐고, 표지 스타일은 PC 서울이 선배인 셈입니다).

 

어쨌거나, 컴퓨터 잡지에 원고를 보내고, 이제나 저제나 책이 나올까 손꼽아 기다리다가 책이 나오는 월말무렵 부터는 아예 종로 서적으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결국 몇 번을 헛걸음한 끝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컴퓨터 원고 하이텔

 

OS/2 Warp가 잡지 광고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ㅠㅠ

컴퓨터 원고 하이텔

 

지금은 메인보드 하면 ASUS, 기가바이트, ASRock 등 대만 제품 일색이지만, 당시에는 '석정'이라고 하는 국내 메이커도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성능과 가격 모두 꽤 괜찮았지만, 한 때 화제가 되었던 가짜 캐시 메모리 사건에 연루되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지 않았나...기억됩니다.

컴퓨터 원고 하이텔

하지만 종로 서적을 출퇴근하던 당시에는 이런 광고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과연 내 글이 잡지에 실렸을까? 혹시 개판이라고 짤리지는 않았을까? 원고가 넘쳐 다음 달로 밀린 것은 아닐까?'하는 설레임과 염려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던 기억이 납니다.

 

헉! 드디어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두근두근 수준이 아닌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몇 번이고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서점에는 책을 뒤적이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이 기사 제가 쓴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아마 요즘 같았으면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노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ㅡㅡㅋ

컴퓨터 원고 하이텔

 

요즘은 책이나 잡지들이 죄다 컬러판으로 나오지만 당시만해도 책 앞쪽의 광고나 특집 기사만 컬러 인쇄로 나오고 책의 중간을 넘어가면 흑백인쇄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인쇄 상태 역시 무척 열악하여 열심히 캡쳐해서 보낸 이미지가 대체 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단지 내가 쓴 원고가 컴퓨터 잡지에 인쇄가 되어 나왔다는 생각밖에,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컴퓨터 원고 하이텔

 

이 후 원고 경력이 늘어나면서 여러 컴퓨터 잡지에 글을 쓰게 되었고, 한창 글을 많이 쓸 때는 특집 기사, 벤치 마크, 10여 개의 리뷰와 Q&A 기사 등등 한 달에 150페이지에 가까운 원고를 동시에 '찍어대기도' 했습니다.

 

단행본들도 출간했고 2000년대 초반에는 모 컴퓨터 잡지사의 취재 기자로 입사하여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컴퓨터와 함께 신나게 놀 수 있었던 것은 1996년 1월에 PC 서울과 맺었던 인연이 시작이었습니다(하지만 아쉽게도 PC서울은 약 1년 뒤 폐간됩니다).

 

그 첫 원고는 책으로 다섯 페이지 분량이었는데, 다섯 페이지짜리 원고를 쓰는데 거의 보름 정도를 매달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원고의 내용 뿐 아니라 나름대로 말을 매끄럽게 다듬고 고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실제 잡지에 실린 원고는 제가 보냈던 원고와는 사못 다르더군요. 반 년쯤 지나 꽤 친해지게 된 담당 기자에게 첫 원고에 정말 정성을 들였다고 얘기하자, '그 첫 원고, 정말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 진창이어서 거의 전부 고쳤다'고 말하더군요.

 

이제 나도 전문 필자라며 으쓱하며 지내던 제 얼굴을 벌개지게 만들었던 그 사건이, 다이어리를 보자 새삼 떠오릅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 질문 댓글은 공개글로 달아주세요. 특별한 이유없는 비밀 댓글에는 답변하지 않습니다

Designed by JB FACTORY